퍼실리테이터는 중립적인 사람인가, 아니면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인가
학교에서 교사 협의회를 진행하는 부장 교사가 있다. 그는 안건을 제안하고, 동료들의 의견을 듣고, 때로는 결론을 내린다. 한편 외부에서 초빙된 퍼실리테이터는 아무 의견도 내지 않은 채 대화 흐름만 조율한다. 두 사람 모두 "퍼실리테이션을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같은 일을 하는 걸까.
기업 워크숍 자리에서도 비슷한 혼란이 벌어진다. 팀장은 "제 생각에는 이 방향이 맞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묻는다. 퍼실리테이션처럼 보이지만, 이미 결론을 향해 대화를 끌고 있다. 이 두 장면은 같은 질문을 가리킨다. 퍼실리테이터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나의 직능이 아니라 다섯 가지 역할의 스펙트럼
Schwarz(2002)는 퍼실리테이터를 단일 직능으로 묶지 말고, 상황·목적·계약에 따라 분화되는 다섯 가지 역할 유형의 집합으로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유형론은 "퍼실리테이터는 중립이어야 한다"는 통념이 특정 역할에만 해당하는 제한적 원칙임을 정리한다.
다섯 유형은 이렇다.
-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는 내용에 완전히 중립적인 채 그룹 프로세스에만 책임을 진다.
- 퍼실리테이티브 리더(Facilitative Leader)는 내용에 대한 책임을 가지면서 퍼실리테이티브 방식으로 그룹을 이끈다.
- 퍼실리테이티브 코치(Facilitative Coach)는 개인이나 그룹이 스스로 문제를 풀도록 역량 강화에 집중한다.
- 퍼실리테이티브 컨설턴트(Facilitative Consultant)는 내용 전문성을 제공하되 퍼실리테이티브 방식으로 개입한다.
- 퍼실리테이티브 트레이너(Facilitative Trainer)는 학습 목표 전달과 그룹 참여를 병행한다.
이 다섯 역할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동일 상황에서 복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Schwarz(2002)는 역할 혼동이 퍼실리테이터 정체성 위기와 그룹 효과성 저하의 주요 원인이라고 제시한다. 즉 문제는 어떤 역할을 맡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자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어떻게 퍼실리테이션하느냐'를 결정한다
역할 유형론의 심층에는 마인드셋 구분이 있다. Schwarz(2002)는 퍼실리테이터의 작동 방식을 상호 학습(Mutual Learning)과 일방적 통제(Unilateral Control) 두 가지로 대비시킨다.
일방적 통제 방식에서 퍼실리테이터는 자신의 목표를 관철하려 하고, 감정을 억제하며, 그룹 구성원을 설득 대상으로 본다. 반면 상호 학습 방식은 투명성·호기심·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선택·책무성·자비를 핵심 가치로 삼아 그룹과 함께 배우는 태도를 전제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어떻게 퍼실리테이션하느냐를 결정한다"는 것이 이 구분의 핵심이다.
모든 실천 규범은 네 가지 핵심 가치에서 파생된다고 Schwarz(2002)는 제시한다. 유효한 정보 (valid information) : 그룹이 정확하고 완전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도록 지원한다. 자유롭고 충분히 정보에 근거한 선택 (free and informed choice) : 외부 압력 없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돕는다. 내적 헌신 (internal commitment) : 결정에 대한 자발적 책임감을 형성한다. 자비/배려 (compassion) : 그룹 구성원을 판단 대상이 아닌 이해 대상으로 바라본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이 네 가지 가치, 특히 '자유로운 선택'과 '내적 헌신'은 그룹 내 심리적 안전감이 확보될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하다. 심리적 안전감은 상호 학습 접근이 작동하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위치 지을 수 있다.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서 투명성은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개입의 깊이를 결정하는 두 축: 기본 퍼실리테이션과 발달적 퍼실리테이션
Schwarz(2002)는 퍼실리테이션의 목적 범위에 따라 두 가지를 구분한다. 기본 퍼실리테이션(Basic Facilitation)은 그룹의 즉각적 과업 달성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오늘 회의를 잘 마치는 것이 목표다. 발달적 퍼실리테이션(Developmental Facilitation)은 그룹이 상호 학습 행동 자체를 장기적으로 내면화하도록 지원한다. 다음 회의도, 그다음 회의도 잘 할 수 있도록 그룹 자체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목표다.
이 구분은 실무에서 계약 범위를 정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단발성 워크숍 의뢰라면 기본 퍼실리테이션으로 계약 범위를 정의하는 게 맞다. 반면 학교 학습 공동체나 기업 팀 문화 개선 프로젝트처럼 반복적 개입이 예정된 경우라면 발달적 퍼실리테이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 원리는 직장 팀 회의 설계나 지역사회 숙의 과정 설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만 그룹이 상호 학습 행동을 내면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반복 횟수에 대한 경험적 근거는 원저에서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 발달적 퍼실리테이션의 효과를 실제 현장에 적용할 때는 방향성으로 읽고, 맥락별 관찰과 검증을 병행할 것을 권한다.
서클 철학·공유리더십 연구와 만나는 지점
서클 대화에서 퍼실리테이터는 발언권을 특정인에게 몰아주지 않는 구조를 설계한다. Schwarz(2002)의 언어로 옮기면, 이것은 '자유롭고 충분히 정보에 근거한 선택'과 '내적 헌신'이 구조적으로 실현되는 방식이다. 서클이 구조 설계로 푸는 문제를 슈워츠는 마인드셋과 역할 명료화로 접근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같다.
퍼실리테이티브 리더 역할은 퍼실리테이션 역량이 리더십으로 이전될 수 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이전 글에서 다룬 이명희·정기수(2021)의 연구, 즉 퍼실리테이션이 공유리더십을 경유해 팀 효과성으로 이어지는 매개 경로는, 슈워츠가 말하는 퍼실리테이티브 리더 역할이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을 실증 맥락에서 보여주는 사례로 읽을 수 있다.
또 Heron의 6차원 개입 프레임워크는 슈워츠의 5가지 역할 유형론과 유사한 분류 논리를 따른다. 두 프레임워크를 함께 놓으면 역할별 개입 방식의 스펙트럼을 더 정밀하게 그릴 수 있다.
현장에서 이렇게 ...
학교 맥락. 수석 교사가 신규 교사 수업 협의회를 진행한다. 그는 수업에 대해 의견을 가진 내용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서 그가 "오늘은 제가 의견을 내지 않고 질문만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아무 선언 없이 진행하는 것은 다른 경험을 만든다. 역할을 명시하지 않으면 그룹은 그가 내용 평가자인지 프로세스 조력자인지 끝내 알 수 없다. 슈워츠의 역할 유형론은 이 혼동을 계약 언어로 풀 수 있게 해준다.
직장 맥락. 팀장이 분기 회고 워크숍을 직접 진행하려 한다. 팀장은 내용(성과 판단)과 프로세스(진행) 모두에 관여하는 위치다. 이때 선택지는 두 가지다. 퍼실리테이터로서 내용 중립을 지키거나, 퍼실리테이티브 리더로서 자신의 판단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진행하거나. 어느 쪽이든 선택 자체를 명시해야 한다. 명시하지 않으면 팀원은 팀장의 발언이 "개인 의견"인지 "결론"인지 판단할 근거를 잃는다.
지금 바로 해볼 수 있는 것
다음 회의나 협의 자리에 들어가기 전, 자신이 오늘 어느 역할을 맡는지 한 문장으로 적어본다. "나는 오늘 내용 판단 없이 프로세스만 조율한다" 혹은 "나는 내 의견을 가지면서 그룹 참여를 이끈다"처럼. 이 한 문장이 진행 중 흔들릴 때 돌아올 기준이 된다.
회의 시작 전 그룹에 역할을 공개한다. "오늘 저는 의견을 내지 않고 질문 역할만 하겠습니다"처럼 짧게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그룹의 발언 패턴이 달라진다.
회의가 끝난 뒤 자신이 계획한 역할과 실제로 한 행동 사이의 간극을 점검한다. "어느 순간 내가 내용에 개입했나?" 이 자기 관찰이 상호 학습 접근의 출발점이다.
역할이 명확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기술도 그룹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이 글은 Schwarz, Roger M.(2002)의 The Skilled Facilitator: A Comprehensive Resource for Consultants, Facilitators, Managers, Trainers, and Coaches (2nd ed.)(Jossey-Bass, San Francisco)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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