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지키기'가 오히려 침묵을 만드는 순간
서클 진행 중 이런 상황을 본 적 있다. 토킹피스가 한 바퀴 도는 동안 어떤 사람은 세 문장씩 말하고, 어떤 사람은 "괜찮아요"라고만 한다. 퍼실리테이터는 중립을 지킨다며 끼어들지 않는다. 그 침묵은 존중받은 걸까, 방치된 걸까.
직장 팀 회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진다. '모두 동등하게 발언합시다'라는 선언이 있고, 막상 말문을 여는 건 언제나 같은 사람들이다. 구조는 평등했지만 결과는 평등하지 않았다.

5대 개입 원칙과 현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
퍼실리테이션의 5대 개입원칙—중립성, 존중, 명확성, 최소개입, 집단책임—은 갈등 개입의 규범적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회복적 정의 서클(restorative justice circle)은 이 원칙들을 절차로 구현한 대표적 구조다. 토킹피스 순환이 존중을, 자율 대화가 최소개입을, 공동 결정이 집단책임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Parker & Bickmore(2021)는 이 대응 관계가 실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질적 사례연구로 들여다봤다. 연구 배경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 중등 보건 교과 한 학급이다. 성 건강·정체성·관계를 주제로 다루는, 권력과 정체성 역학이 특히 두드러지는 맥락이었다. 같은 긴장이 덜 민감한 주제의 서클에서 동일한 강도로 나타난다고 볼 수는 없으며, 한국 교실이나 기업 맥락에 그대로 적용할 때는 별도의 맥락이 고려할 필요가 있겠으나 이 점을 전제하고 연구의 핵심 발견을 보자.
- 중립성은 공평한 진행자 역할로 구현되지만, 현장에서는 '현상 유지에 공모'로 전락할 수 있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목격하면서도 "내 역할은 개입하지 않는 것"이라 판단하는 순간, 중립 선언이 침묵의 방패가 된다.
- 존중은 토킹피스를 통한 동등 발언권으로 설계된다. 그러나 사회적·문화적 자본의 격차는 구조 바깥에 있다. 발언 기회가 같아도, 그 기회를 실제로 활용하는 역량은 같지 않다.
- 최소개입은 구성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원칙이다. 그런데 개입을 줄일수록 기존 권력 역학이 그 자리를 채운다. 퍼실리테이터가 물러설 때, 더 많은 것이 방치될 수 있다.
- 집단책임은 전원 참여와 공동 결정을 전제한다. 특정 정체성 집단의 목소리가 구조적으로 배제된 상태라면, 집단의 결정은 집단 전체의 것이 아니다.
이 긴장들은 운영 미숙의 문제가 아니다. 원칙 자체가 사회문화적 권력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설계 단계의 취약성이 발생될 수 있다.
보완 개념: 왜 '중립 이후의 공정성'이 필요한가
이 연구의 발견은 '퍼실리테이터 중립성 재정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편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향을 인식한 위에서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을 중립성의 대안으로 보는 시각이다.
왜 필요한가. 편향 없는 퍼실리테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립 선언은 그 편향을 은폐할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위치성(positionality)을 공개하는 것이 신뢰를 만들고 발언 다양성을 늘릴 수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 무엇을 하는가. 시작 전에 퍼실리테이터가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이다"를 먼저 밝힌다. 이는 참여자들에게 '이 공간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허용된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
기존 실무 개념과의 연결
심리적 안전감 논의에서 자주 빠지는 지점이 있다. 집단 평균으로 측정된 심리적 안전감이 불평등 분포를 가린다는 점이다. "우리 팀은 안전하다"는 평균 점수 뒤에, 특정 구성원은 전혀 안전하지 않은 경험을 하고 있을 수 있다. Parker & Bickmore(2021)이 보여주는 서클 내 침묵의 구조는 이 문제와 정확히 같은 결을 가진다.
NVC(비폭력대화)와 서클은 모두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그런데 NVC의 관찰-느낌-욕구-부탁 구조를 쓰더라도, 그 구조를 유창하게 다루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다. 구조가 좋다고 격차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집단 대화 기술을 가르칠 때도 이 지점은 반복된다. 토킹피스를 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그 자리에서 실제로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다른 훈련이다.
현장에서 이렇게 ....
학교 서클 맥락. 한 중학교 담임교사가 학급 갈등을 다루려 서클을 열었다. 토킹피스는 공평하게 돌았다. 그런데 사후 개별 면담에서, 평소 말수가 적었던 학생 두 명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못 했다"고 털어놨다. 교사는 "말할 기회는 줬는데"라고 했다. 기회를 주는 것과 실질적으로 발언이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서클 전에 짝 대화(dyad)를 먼저 배치하는 방식이 이 간극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지역사회 주민 모임 맥락. 동네 공동체 회의에서 "모두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원탁 토론"을 진행한다고 하자. 오래 거주한 주민, 새로 이사 온 주민, 문화가 다른 주민이 함께 앉아 있다. 발언 순서는 평등하지만, '이 공간에서 말해도 괜찮다'는 감각은 불평등하게 분포한다. 집단책임이 실현되려면 그 감각의 불균등을 먼저 다뤄야 한다.
이 원리는 직장 회의나 비영리 조직의 의사결정 구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절차적 평등이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질문은 서클이 열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유효하다.
그래서 무엇을 해볼 수 있나
시작하기 전, 퍼실리테이터가 자신의 위치를 한 문장으로 밝혀본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중립 선언'보다 더 정직한 출발일 수 있다.
전체 서클 전에 2인 짝 대화나 소집단 사전 대화를 배치해, 사회문화적으로 낮은 포펜셜을 가진 참여자가 먼저 말을 꺼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서클이 끝난 뒤 "오늘 하고 싶었지만 못 한 말이 있었나요?"를 익명 메모나 개별 대화로 수집해본다. 발언하지 않은 사람의 경험을 보이지 않는 데이터로 방치하지 않는다.
서클이 좋은 구조라는 것과, 그 구조가 자동으로 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이 글은 Parker & Bickmore(2021)의 연구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원 논문은 "Complexity in restorative justice education circles: Power and privilege in voicing perspectives about sexual health, identities, and relationships"(Christina Parker, Kathy Bickmore, 2021, Journal of Moral Education)이며, 캐나다 온타리오 주 단일 학교의 중등 보건 교과 1개 학급을 대상으로 한 질적 사례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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